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7세 (문단 편집) === 어머니의 섭정 === 우여곡절 끝에 섭정을 맡게 된 조이 황태후는 먼저 아쇼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르메니아로 원정 가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듬해 봄, 아쇼트는 제국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페르시아]]의 [[아미르]] [[유수프]]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아르메니아의 서부 전체와 동부 대부분이 아쇼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로도 4년간 더 전쟁이 벌어졌지만, 대체로 아쇼트가 아르메니아에서 우세를 확보했고 조이는 첫번째 원정을 승리로 장식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또한 제국군은 [[타르소스]]에서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격파했고 남이탈리아의 랑고바르디아 테마에서 사라센군을 궤멸시켰다. [[915년]] 9월, 시메온은 니콜라오스 총대주교가 실각하고 조이 황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으며 자기 딸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를 결혼시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그러다가 [[917년]]에 시메온의 군대가 트라키아로 돌아가자, 조이 황태후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황태후의 밀명을 받들어 한때 시메온의 동맹 세력이었던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군할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이로 인해 페체네그족은 자신들을 수송할 제국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그해 겨울, 시메온이 군대를 이끌고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하고 콘스탄티노플 성벽까지 밀어닥치자,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한편, 조이 황태후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